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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연구자가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기 어려운 이유들

앞의 논의들은 연구자가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설득력 있는 이유를 제공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그것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준을 찾기가 쉽지 않다. 여러 가지 구조적인 상황들도 개별 연구자가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데 어려움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보다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러한 장애물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추구하는 가치의 모호성

위에서 언급한 바 있는 과학기술인 윤리강령에서 말하는 ‘인간의 삶의 질과 복지 향상’이 의미하는 바는 대단히 모호하다. 삶의 질에 대한 개인적 이해가 다를 수 있고, 한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적 특성에 따라 복지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또한 이러한 개념들을 어떤 시공간적인 틀로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도 있다. 단기간 동안 건강, 안전과 같은 삶의 질과 복지를 도모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위협이 되는 과학기술들이 있다. 또 그 과학기술이 사용되는 해당 지역에서는 유익하지만 결과적으로 다른 지역에 피해를 끼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인문학이나 사회학과 관련해서도, 그 학문 분야들에서의 연구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양한 입장과 주장이 있을 수 있다. ‘인간’의 범위를 어떻게 한정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인간의 삶의 질과 복지의 향상이 비인간화, 공동체의 파괴, 전지구화와 같은 문제들까지 포함하는지도 불명확하다.

2) 피고용인으로서의 연구자

과학기술인의 사회적 책임을 논하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는 대다수의 과학기술인들이 피고용인의 입장에 있다는 사실이다. 의사나 법조인 같은 다른 전문직 종사자들과는 달리 과학기술인은 기본적으로 기업이나 국가, 연구소에 고용되어 일정한 제약 하에서 연구 활동을 하게 된다. 연구의 자율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없지 않지만, 과학기술 프로젝트의 규모가 커지면서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무한정의 자유를 획득하기를 어렵다. 소속된 기관이 연구의 방향을 일정하게 조정하려 할 경우에 문제가 커지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앞서 살펴본 예에서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정부에, 평화의 댐 건설단장은 한국 정부에 고용되어 있었다. 물론 현재 진행되는 수많은 과학기술 프로젝트들이 전쟁이나 독재 치하와 같은 극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피고용인의 신분과 사회적 책임의 주체라는 위치가 조화롭게 어울리기 힘들다.

인문학과 사회학 분야에서는 이 문제가 상대적으로 덜 심각하다. 특히 인문학의 경우 공동연구를 하는 경우도 드물기 때문에 프로젝트 전체에 대해서 한 연구자가 책임을 질 수 있다. 물론 연구소를 대상으로 한 대형 연구지원금이 주어진 경우에는 위와 비슷한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3) 불분명한 책임소재

사회적 악영향 혹은 기여에 대한 연구자의 책임소재의 문제도 불분명한 부분이 있다.

오늘날 과학기술인의 활동은 분업적인 성격을 지닌다. 거시적으로 볼 때는 과학과 공학의 구분이 점점 모호해지고, 그 구분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뚜렷한 연속성을 전제로 양 분야의 연구개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미시적인 차원에서도 공동작업을 통해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이렇게 복잡한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개별 연구자가 어떤 방식으로 얼마만큼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과학기술 연구개발은 더욱 세분화되는데 반해 그 사회적 결과들은 더욱 미묘한 방식으로 표출되기 때문에, 결국 사회적 책임의 소재를 명확하게 밝히기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수행하는 연구개발 프로젝트가 어떤 사회적인 함의를 가지느냐를 생각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기란 쉽지 않다. 우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로 나타나게 될 지에 대해서 모르는 경우가 많고, 설사 안다 하더라도 그에 대해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할 가능성은 많지 않다.

인문학과 사회학의 경우에도 그 사회적 효과와 관련해서는 위와 비슷한 방식으로 책임 소재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물론 이들 분야에서는 한 연구 프로젝트 내에서의 역할 책임보다는 개별 연구들 사이의 역할 책임이 문제가 될 것이다.) 즉, 인문학과 사회학 연구들의 경우 즉각적인 사회적 효과를 나타내기보다는 일정한 시간이 지나 그간에 이루어진 여러 연구결과들이 복합적으로 어떤 영향력을 가지게 되는데, 이 경우 그 결과의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수 있는지 애매하다.

4) 극심한 경쟁

황우석 전 교수가 상당기간 동안 자신의 거짓말을 속일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줄기세포와 관련한 모든 논의가 결국은 ‘세계 1등’으로 모아지는 분위기였다. 미국이나 일본보다 먼저 줄기세포 수립에 성공했기 때문에 국익이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팽배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들도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침묵을 지켰는지 모른다. 살벌한 자본주의 시장의 경쟁과 국가간 치열한 다툼 속에서 과학기술 개발은 승리를 보장하는 중요한 요건이 된다. 따라서 과학기술인이 사회적 책임을 이유로 자신에게 주어진 연구개발 업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거나 회의하는 것을 용납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과학기술인들 자신도 일정한 경쟁의식에 사로잡혀 자신이 수행하고 있는 연구개발의 목적과 의미, 일어날 수도 있는 부작용이나 사회적 파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오로지 단기적인 성취에 집착하기 쉽다.

인문학과 사회학의 경우 경쟁의 문제는 다른 방식으로 드러난다. 논문의 편수로 학자의 탁월성을 평가하는 분위기 속에서는, 일정한 기간 동안 사고를 숙성시키거나 광범위한 데이터를 수집해야 하는 이들 분야의 연구 업적들이 부실해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물론 부실한 연구가 가지는 사회적 폐해는 과학기술 분야에 비해 훨씬 더 적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문학과 사회학의 연구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면, 인문학적 성찰과 사회학적 탐구가 부실해지는 것이 장기적으로 사회적인 악영향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