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들은 과연 자신의 연구 및 개발과 관련하여 그 직접적일 결과 뿐 아니라 사회적인 책임까지 짊어져야 하는가? 예를 들어 원자폭탄 제조에 관여했던 물리학자들은 원자폭탄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서까지 우려할 책임이 있었는가? 인문학 연구자들에게 자신의 연구가 사회적으로 미칠 영향까지 생각하라고 하는 것은 과도한 요구가 아닌가? 연구자들의 사회적 책임을 논하기 전에 가장 근본적인 물음으로 제기되는 것은 왜 그 책임을 져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학문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연구가 가치중립적이라는 주장은 일면 타당하지만 많은 문제가 있다. 연구의 결과는 언제나 특정한 사회적 맥락에서 받아들여지거나 사용되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기 때문이다.
특히 과학기술의 영역에서는 같은 과학기술이라도 잘 사용하면 좋지만 잘못 사용하면 문제가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기술 자체만 보아서는 그 용도와 무관하게 중립적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이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선 세상 사람들이 모두 선하고 착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악용하지 않으면 된다는 말은 너무 쉽다. 가능성은 언제나 현실화될 수 있다. 미국의 총기협회(National Rifle Association)에서는 “총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총기규제에 반대하지만, 부당한 사용자가 생겨날 것이란 사실을 잘 알면서도 총기를 자유롭게 유통시키는 것이 윤리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보는 것은 지나치다. 점점 더 많은 연구가 개인에 의해서 이루어지기보다 특정 단체나 정부와 연관되어 이루어진다는 점도 연구의 중립성을 주장할 수 없는 이유다. 여러 가지 종류의 공적자금이 연구에 사용되는데, 이 때 연구비를 제공하는 주체, 즉 기업이나 정부, 이익단체 등의 목표에 따라 연구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 현대의 학술연구와 개발이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이러한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완전히 독립적인 과학기술 활동은 거의 불가능하다.
과학기술의 영역에서는 의도하지 않았거나 예측하기 힘든 결과들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된다. 독일의 철학자 요나스에 의하면, 예측불가능성은 현대기술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원자폭탄이나 총기류는 그나마 좀 나은 편이다. 무기 자체가 중립적이라 보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여전히 사용을 억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학비료의 경우, 원자폭탄처럼 순식간에 비극적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더라도 장기간 사용하면 원자폭탄만큼의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현대 과학기술이 대형화되고 그 시공간적 범위가 넓어지면서 좋은 의도로 개발한 과학기술적 성과들조차 결과적으로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의료기술의 눈부신 발달로 유아사망률은 크게 줄어들었지만 늘어나는 인구 때문에 환경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딜레마의 상황이다.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아를 살리기 위한 노력을 그만둘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불치병을 고치려는 좋은 의도로 개발하는 생명공학의 여러 시도들이 장차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문제의 심각성은 예측하기 힘든 결과들이 단지 물질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인 결과들로 전이된다는 데 있다.
이렇듯 현대 과학기술이 예측하기 힘든 결과들을 양산하는 것은 불가피한 면도 없지 않지만, 결과를 예측하고 숙고해보는 여유를 허락하지 않은 채 무조건적인 발전만을 추구하는 태도도 문제다. 과학기술의 장기적이거나 간접적인 영향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한 과학기술의 결과에 대한 예측 불가능성은 더욱 심화될 뿐이다. 과학기술인의 사회적 책임은 바로 이러한 자각에서 비롯된다.
모든 연구의 결과는 어떤 방식으로든 사회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현대 지식기반사회의 특징은 그 영향력이 극대화되어 있다는데 있다. 더 밀접하고 치밀하게 조직된 사회일수록 이러한 영향력은 더욱 커지게 된다.
사회학적 연구의 결과는 국가의 정책적 판단과 즉각 연결되어 큰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청소년의 인터넷 중독 실태에 관한 연구를 예로 들자면, 실태조사의 결과에 어떻게 나왔느냐에 따라 교육정책과 청소년 정책, 나아가서 컴퓨터 관련 각종 규제 정책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교육학이나 역사학, 철학 분야에서의 연구는 간접적으로 여러 가지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물리적인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현대과학기술이 가지는 엄청난 위력을 빼놓을 수 없다.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현대의 기술이 인간에 미치는 영향력은 양적, 질적, 시간적인 면에서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지난 200여 년 동안 인간이 과학기술을 통해 이룩한 변화는 인류가 생겨난 이래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변화 중 가장 급격한 것이었다.
과거의 인간 행위는 인간을 초월하는 자연을 배경으로 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대자연의 비인격적인 힘과 법칙을 이길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현대기술의 발전을 통해 인간은 이제 자연을 통째로 파괴할 수 있을 만한 힘을 가지게 되었고, 자연은 보호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요나스는 현대과학기술을 통해 인간 행위의 본질이 바뀌었다고까지 말한다. 그는 이러한 변화 때문에 현대의 윤리는 그 적용의 영역을 인간사회로부터 자연으로 확장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지금까지의 윤리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문제를 다루었다면, 현대의 윤리는 자연의 존재 자체에 대한 책임의 문제까지 포괄하게 되는 것이다.
요나스의 주장은 과학기술에 관한 것이지만, 그 자체로는 철학과 윤리학에 속하는 이론이다. 만약 우리가 요나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인간 행위의 본질을 바꾼 현대기술 발전의 선봉에 서 있는 과학기술인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되고, 그의 주장을 받아들임으로써 인문학의 영향력에 노출되는 것이다.
연구자들의 전문 지식은 나날이 세분화되어 이제 어느 학문 분야에서건 자신의 전공이 아닌 부분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그 적절성은 논외로 쳐야 하겠지만, 전문적 지식에 사회가 많이 의존하고 있는데 해당 전문가는 소수에 불과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들 전문가에게 사회적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또다시 과학기술의 예를 들자면, 오늘날 과학기술이 발달된 사회들에서는 과학기술이 인간의 삶 모든 영역에 파고들어 있음에도 그 구조를 이해하고 있는 극소수라는 점을 들 수 있겠다. 국민 대다수가 휴대전화로 끊임없이 통화를 하고 텔레비전 시청까지 하게 되었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원리를 아는 이는 거의 없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오늘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과학기술적 장치와 시설들은 과학기술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유지된다. 과거 그 어느 때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불특정 다수)의 일상적 삶이 한 전문가 집단에 완전하게 매달려 있었던 적은 없었다.
정보의 집중은 비단 과학기술 분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인문학과 사회학의 연구들도 점점 대규모화하거나 전문적이 되고 있어서, 특별한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이 접근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현재 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연구들은 공적자금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에 인문학 분야에는 거의 연구비가 주어지지 않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인문학에도 상당한 액수의 연구비가 주어지고 있다. 과학기술 분야의 발전은 국가의 명운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고 있으며, 따라서 과학기술에 대한 지원은 공공적인 성격을 띤다. 아직까지 그 성공 여부가 분명하지 않은 신기술에 정부가 막대한 공적 자금을 투자하는 일이 드물지 않으며, 과학기술 발전을 독려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에 모든 정부들이 큰 힘을 쏟고 있다.
물론 모든 연구자가 공적 자금을 받아 연구를 진행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학이나 과학기술 분야의 경우 연구 및 개발 프로젝트가 점점 대형화되고 그에 사용되는 기자재 등이 정교화 됨에 따라서, 개인적 차원에서 과학기술 연구를 지원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연구 프로젝트는 국가나 거대 기업의 지원을 받는 것이 불가피하게 된다.
공적 자금은 결국 세금이거나 기업에 투자한 개인들의 돈이므로 그것을 사용하여 연구를 진행하는 과학기술인들이 자신들의 연구가 가지는 사회적 의미를 생각하고 책임 있는 태도를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황우석 전 교수의 연구 사기가 특별히 심각했던 것은 국가에서 지급하는 수많은 연구비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학문의 자율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에는 부정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공적 자금이 투여되는 상황에서 연구의 자율성만을 고집하는 것은 과거에 비해 그 정당성이 상당히 줄어들게 된다. 인문학의 경우에는 이 문제가 좀 더 민감한 주제가 될 수 있다. 인문학의 경우는 연구결과에 대한 기대보다 학문의 활성화를 위한 지원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고, 학문의 특성상 학자 개인의 신념이 투영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연구비를 받았다고 해서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책임을 어떤 식으로 요구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책임이 법적 책임이기 이전에 도덕적 책임이다. 학문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지 자신의 연구가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스스로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생명의료공학과 같은 경우에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이들 분야에서는 생로병사에 대한 오랜 이해를 송두리째 흔들 수 있는 변화를 초래하기 때문에 우리 사회의 윤리와 문화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경우에 관련분야에 종사하는 과학기술인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길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노력일 것이다. 얼마만큼의 개발과 어떤 종류의 기술이 허용될 수 있는지, 어떤 규제나 제한이 정당화되는지에 대한 세심한 논의들이 필요하다.
자신이 직접 관여하지 않더라도, 여러 가지 상황에서 전문가적 조언을 제공하는 경우에 전문가의 사회적 책임은 매우 크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문가들이 관련 분야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독점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각종 정책을 마련하거나 법정 소송을 진행할 경우에 요구되는 전문가 조언은 철저하게 사회적 이익을 위해서 제공되어야 한다.
이 외에도 세계화의 문제, 빈곤의 문제, 인구 문제, 위험의 문제, 교육의 문제 등 전문가적인 학술연구에 의해 초래되거나 해소될 수 있는 문제들은 수도 없이 많다. 모든 연구자들이 이 모든 것들을 다 이해하고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자신들의 일이 이러한 문제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사태가 더욱 악화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